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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북(北)을 믿는가?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박사
 
상주시민뉴스 기사입력  2019/03/28 [09:17] ⓒ 상주시민신문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작년 4월에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남북의 정상이 만나서 소위 「4.27 판문점 선언」을 했습니다. 세부적적인 내용은 없었으나 상징적 의미와 선언적 의미가 컷기 때문에 한반도에 드디어 봄이 오는듯한 생각을 가졌고, 당시 국제사회도 한반도 비핵화로 가는 첫 단추를 잘 끼운 성공적인 회담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6월에 1차 북미정상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려서 비핵화를 포함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대해서 두 정상이 뜻을 같이 하자 우리들의 꿈은 더 현실화가 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북미회담이 아무런 성과없이 깨어지자, 우리들의 기대도 한꺼번에 무너졌습니다.
  정부가 워낙 적극적으로 잘될 것이라고 홍보를 한 탓에 잠시 공산주의자들의 생리를 잊었던 것 같습니다. 
  
  68년 전의 일입니다.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일어난 뒤, 계속되는 전쟁에 부담을 느낀 UN군과 공산군은 비밀 접촉을 거쳐 1951년 7월 10일 개성(開城)에서 첫 「정전 회담(停戰會談)」을 열었고, 최종 서명하는데 2년간이란 시간이 걸려서 1953년 7월 27일 정전(停戰)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클라크(Mark Wayne Clark) 장군은 ‘금방 정전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넘어야할 산들이 너무나 많았다’고 했고, 소련이 처음에 휴전을 제의했을 때, 당시 변영태(卞榮泰) 외무부장관은,

 

  “공산주의자들은 생리적으로 협상의 상대가 될 수 없으며, 그들이 휴전을 제의한 이면에는 반드시 음흉하고 가공할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는 사실을 간곡하게 호소했으나, 미국 등 서방국가들은 이 쓴 소리를 외면하고 서둘러 소련의 제의를 수락했었습니다. 당시 서방진영의 수뇌들은 빠르면 수일, 늦어도 수주일이면 휴전(休戰)이 성립될 것으로 판단하였으나, 2년 여의 긴 세월을 공산측 대표들의 교활한 술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불필요한 희생만을 치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휴전회담에서 유엔군 측 초대 대표였던 조이(Joy) 미국 해군제독도 그가 겪은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경험을 강조하였습니다.

 

  “공산주의자와 협상할 때는 군사적 압력이라는 절대적 논리 이외에 이에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내와 논리도 중요한 것이기는 하나 그것이 결코 결정적일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 그들과의 협상에서는 오직 힘만이 정의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힘으로 무장하지 않는 한, 또한 우리가 그 힘을 사용하는 데 과감하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없을뿐더러 우리의 주장을 논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조이(Joy) 제독의 이와 같은 주장은 한국전쟁의 마지막 국면에서 미국이 전략적으로 실패하였음을 암시한 것이었으며, 그 원인이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인식 부족이었음을 경고하고, 미국을 위시한 서방 지도자들에게 공동의 적(敵)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인식의 재정립을 촉구한 것이었습니다.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자, 우리의 부푼 꿈을 깨어버린 사람이 누구냐가 이야기되고 있고, 나라의 명운이 걸린 이런 일에 대해서 정부가 너무 앞장선 일도 지적되고 있습니다.
  정부가 요란하게 장밋빛 꿈을 꾸도록 할 것이 아니라 ‘예의 주시해야 한다’는 신중한 접근이 지금이라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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