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문화 >
‘웰다잉’을 위한 죽음교육전문가:싸나토로지스트
 
상주시민뉴스 기사입력  2015/02/13 [17:53] ⓒ 상주시민신문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아름다운 마무리 ‘웰다잉’을 위한 죽음교육전문가:싸나토로지스트

최근 국내 최초로 웰다잉(well dying) 박람회가 열렸다.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것들을 버킷리스트나 엔딩노트로 작성하는 사람도 있다. 유언장 작성, 관 체험 등등으로 가상죽음체험도 한다. 모두 웰다잉에 대한 높은 관심의 발현이다.

죽음교육전문가, 혹은 상실비탄애도전문가를 싸나토로지스트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생소한 이 이름에 대해 알아보자.

 

웰다잉, 아름다운 마무리

“인간의 삶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에요. 준비 없이 맞이하는 죽음이 아닌, 남아있는 삶을 행복하게, 품위 있게 보내면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웰다잉입니다. 그러므로 웰빙이 곧 웰다잉인거죠.”

웰다잉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의 계기는 환자가족의 연명치료중단 요구를 수용한 의사가 환자가 사망함으로써 유죄를 선고받았던 보라매병원사건(1997년)이었다. 그 후로도 연명치료중단을 요구하면서 존엄사를 택하는 환자들의 사례는 여럿 있었다.

 

“환자는 고통스럽고 가족은 재정적 부담이 큰 것이 연명치료에요. 현대의학에서는 말기환자들의 남아있는 삶보다 치료에 집중하여 환자가 병과 투쟁하게 만듭니다. 얼마 남지 않은 그 시간마저 병과 투쟁하게 하는 거죠. 그러는 동안 가족들은 지치고 환자는 외로움, 불안, 분노, 죄책감, 수치심 등등의 감정으로 인해 가족과 냉랭해지기도 하고요. 아름다운 마무리가 아니지요. 보내는 자, 떠나는 자가 감정적인 화해를 하고 관계를 회복하면서 'say goodbye'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을 안고 떠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럼 이런 역할을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의사? 간호사? 가족? 환자 스스로요? 모두 무리에요. 그래서 필요한 전문가가 바로 싸나토로지스트(Thanatologist)입니다.”

 

아름다운 마무리의 중개자, 싸나토로지스트

싸나토로지스트, 생소한 이름이다. 김근하 이사장은 미국의 Natural Medicine University 대학원에서 임종학(Thanatology)을 전공했다. 싸나토로지는 죽음의 준비,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돌봄, 관계정립, 못다 해결한 인간관계 해결, 평온한 가운데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 제시, 직면한 죽음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 들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싸나토로지스트는 임종과 죽음, 사별, 슬픔, 감정적 손상을 입은 사람들에 대해 영적, 정신적, 육체적 케어와 심리 상담을 담당하는 전문가를 말합니다. 현재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호스피스 완화의학, 심리상담, 보완대체의학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고요. 작년 유엔보고서는 싸나토로지스트를 향후 세계 10위 안에 들어갈 전문직종이라고 소개한 바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싸나토로지협회를 통해 곧 교육과 국제 자격증 취득시험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싸나토로지스트를 배출할 한국싸나토로지협회는 ‘환자중심의 의료미학’을 이 땅에 실천함으로써 ‘인간 본성의 회복’과 ‘인간다움’을 실현하기 위해 설립한 기구이다. 현재 미국 국제죽음협회인 ADEC의 자매기관이다. 한국싸나토로지협회는 현재 ADEC의 공조로, 한국싸나토로지협회가 개발한 BNPT(Brain Neuro-Physiologic Type) 프로그램, 즉 임종영성프로그램, 감정치료프로그램, 인지능력배양프로그램, 공감능력배양프로그램을 각 병원과 대학에서 적용, 실행하고 있다.

 

“싸나토로지스트는 국제 자격증입니다. 매년 11월 초에 1년에 한 번씩 자격증 시험을 볼 예정입니다. 이들은 향후 죽음교육전문가, 상실비탄애도전문가로서 일선 교육기관에서 죽음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일과 노인전문병원, 요양병원을 포함한 급성, 만성기 병원, 호스피스 병원, 또는 독립된 연구소에서 활동할 것입니다.”

 

 싸나토로지스트 제도 도입이 필요한 이유

얼핏 들으면 싸나토로지스트와 기존의 호스피스 역할이 유사해 보인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는 호스피스가 종교 단체 위주로 말기환자들에게 영적, 심리적 안정을 도모하는 돌봄차원의 봉사활동으로 인식돼 있다. 싸나토로지스트는 의사, 간호사 등 의료 관련인이나 죽음학, 심리학 등의 학위를 갖고 필드경험이 2년 이상 된 경력자들이 자격증을 취득하고 활동하는 전문가를 말한다. 이들은 호스피스제도를 보완하고 업그레이드 시킬 것이다”고 전한다.

 

“품위 있는 죽음의 선택 부재, 호스피스 병원 시설 부족,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대한 갈등 증폭,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필요성 급증 등이 싸나토로지스트가 존재해야하는 이유입니다. 말기환자들이 의지하는 호스피스병원은 현재 전국에 24개가 있어요. 그런데 적자수준입니다. 정부재정 없이는 운영이 불가능한데 이를 대체한 새로운 의료시스템이 싸나토로지스트 제도입니다. 제도가 도입되면 복지예산절감효과와 새로운 일자리 창출, 수용자 중심의 의료문화형성이 이뤄지리라 예상합니다.”

 

병원에서 싸나토로지스트제도를 도입했을 때 기대되는 효과도 크다. 국내 최초 임종학(Thanatology)시행병원이라는 이미지 제고, 죽음의 질까지 고려한 환자중심의 진료체계 확립으로 병원의 질 향상 도모, 품위 있는 임종을 원하는 노블리스 환자의 수요급증, 노블리스 환자 중심의 병원 이미지 고양 등이 그것이다.

 

웰빙이 웰다잉이다

그에게 개인이 일상 속에서 웰다잉을 할 수 있는 것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우리 삶은 영원하지 않기에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한달이라면?’ 자문하길 바랍니다. 그럴 때 삶의 우선 순위가 정해지겠지요. 그리고 자신에게 집중할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성찰할 것이고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장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돈도 명예도 아닌 바로 일상의 회복입니다. 그들은 지긋했던 부부싸움 조차도 그리워합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하면서요. 건강한 사람들은 그냥 일상이니까 놓치고 산 그 일상성 회복이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므로 일상을 소중하게 보내는 것, 그것이 웰다잉의 시작이겠지요.”

 

21세기는 3D, 즉 Design, DNA, Divine 시대라 한다. 영성(Divine)은 지금이야 종교적인 용어로 정착돼 있지만 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소우주인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고유한 성질이다. 테레사 수녀는 ‘죽음은 마지막 영적 성장의 기회다’고 말했다. 죽음은 인간 본성과 영성, 신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상의 죽음체험을 한다. 관에 누워보고, 유언장을 작성하고, 버킷리스트를 만든다. 건강할 때 가상의 죽음을 체험하는 것은 우리 삶을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웰빙이 웰다잉인 것이다.

 

죽음교육전문가 : 싸나토로지스트

 

 

■ 육신생명과 정신생명

모든 존재는 태어날 때부터 자기보존(self-preservation)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을 경주한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모든 존재는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사실상 죽음을 향해 줄달음친다. 이런 점에서 죽음은 모든 존재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예정된 필연적이고 불가항력적인, 그러면서도 동시에 아이러니컬한 사건이다.

 

죽음은 한 생명체가 ‘존재’에서 ‘비존재’로 전화(轉化)하는 사건이다. 하지만 사물의 죽음과 달리, 사람의 죽음은 단순하게 ‘존재에서 비존재로의 전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록 생물학적 신체는 소멸하여 ‘비존재’로 전화하지만, 한 사람이 일생동안 살아오며 추구했던 ‘의미의 결정체’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공동체의 ‘의미 저장소’에 보관된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 ‘육신생명’과 ‘정신생명’을 구분해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육신생명(biological life)은 사람이 여타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한시적으로 누리는 ‘생물학적 생명’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정신생명(spiritual life)은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의미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승인되고/공유되고/전해지는 ‘의미론적 생명’을 말한다.

 

육신생명과 정신생명의 차이는 촛농과 촛불의 관계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촛농이 다하면 촛불도 사그라진다. 하지만 개별 촛불이 사그라진다고 해서 ‘불빛 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촛농이 다하면 개별 촛불은 사그라지겠지만, 그 불빛은 다른 촛대에 전이되어 꺼지지 않고 이어지게 된다. 개별 촛대의 촛농이 소진되는 일이 육신생명의 죽음에 해당한다면, 개별 촛대에서 타오르던 불빛이 다른 촛대에 전이되어 계속해서 이어지는 일은 정신생명의 영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보자면, 사람의 육신생명은 유한하지만 정신생명은 영속적이라는 차이를 보인다.

 

여타 사물과 달리, 사람은 생물학적 자기보존만을 위해 삶을 영위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생물학적 층위에서 보자면 ‘자기보존’을 추구하는 생명체의 한 종에 불과하지만, 사람은 생물학적 층위를 넘어서서 의미를 추구하는 ‘의미론적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이 동·식물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필요할 경우, 사람은 자신이 추구하는 의미를 성취하기 위하여 때로는 육신생명을 포기하기도 한다. ['논어'에 나오는 살신성인(殺身成仁), 예수의 죽음, 그리고 인류의 정신사에 기록된 의인과 열사의 죽음이 이에 해당한다.]

 

‘의미’는 진공 속에서 불쑥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망, 즉 ‘의미의 공동체’ 안에서 모종의 교류와 소통을 통해 탄생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의미’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승인과 동의를 거쳐 타인과 후세에 전해지게 된다. 한 사람이 생전에 내보였던 위대한 말과 생각, 타인에게 전범이 될 만한 삶의 방식과 태도,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기울였던 따뜻한 관심과 덕행 등은 육신생명의 소멸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구성원의 뇌리에 영속적으로 간직된다. [동양에서는 비록 ‘불멸하는 영혼’에 대한 종교적 믿음은 없었지만, 덕(德)·공(功)·문(文)으로 대변되는 정신생명이야말로 썩지 않고 후세에 전해지는 불빛이라고 보았다.]

 

■ ‘죽음’(death)과 ‘죽음 맞이하기’(dying)

화살은 활시위를 떠나는 그 순간부터 과녁을 향해 운동한다. 하지만 화살이 아무리 과녁에 근접했다고 해서 운동이 끝났다고 할 수는 없다. 화살은 과녁에 가장 가깝게 근접하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결코 운동을 멈추지 않는다. 사람의 생명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지향한다. 하지만 아무리 죽음이 임박했다고 해서 한 사람의 생명이 끝났다고 할 수는 없다. 생명은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결코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죽음에 다가서는 일’ 역시 생명활동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화살의 경우, 궤도를 날아가서 과녁에 꽂히는 바로 그 순간, 화살의 가치가 최종적으로 결정된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을 살면서 추구해온 의미의 결정체를 마지막으로 완결하는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인생의 다른 어떤 순간보다 가치 있고 소중한 시간이 된다.

 

죽음(death)은 육신생명의 소멸을 가리키지만, ‘죽음에 다가서는 일’(dying)은 아직 생명활동의 한 부분에 해당한다. 죽음은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가 자연의 섭리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되는 불가항력적이고 수동적인 사건이지만, ‘죽음에 잘 다가서는 일’(well-dying)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의 ‘의지’에 의한 능동적 사건이다. 불필요한 연명치료에 의해 육신생명이 수동적으로 연장되는 일, 의료진의 소생시술불가(DNR) 판정에 의해 산소호흡기가 타율적으로 제거되는 일은 능동적으로 ‘죽음에 다가서는 일’이 아니다. 사람은 비록 세상에 나올 때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탄생하지 못했지만, 최소한 죽을 때만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생을 마감하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방식을 택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음’(death)이 수동적·피동적으로 자연의 섭리아래 무릎을 꿇는 일이라면, ‘죽음에 잘 다가서는 일’(well-dying)은 이러한 자연의 섭리에도 불구하고 주체의 자율적 선택과 의지적 결정에 의해 능동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일’을 가리킨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어감과 달리, ‘임종’이라는 단어는 의지적 존재로서의 ‘준비된 죽음’을 표현하기에 한층 적절하다고 보인다. 임(臨)이라는 글자는 수동적이라기보다는 능동적, 그리고 피동적이기보다는 의지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한다. 우리말 사전에서 군림(君臨)이라는 단어는 “임금이 주체적·능동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일이나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타인을 압도하는 일”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처럼 임(臨)이라는 글자에는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됨”(self-sovereignty)의 의미가 강하게 들어있다.

 

신라시대 세속 5계 중의 하나였던 임전무퇴(臨戰無退)라는 성어는 “전쟁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음”을 의미한다. 비록 전쟁이 회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수동적·피동적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당당하게 맞서는 일이 바로 ‘임전무퇴’의 뜻이다. 이처럼 임(臨) 자가 주는 주체적·능동적 어감을 고려할 때, ‘준비된 죽음’ 또는 ‘죽음 잘 맞이하기’를 표현하는 단어로는 그저 ‘죽음’이나 ‘죽어감’이라는 단어보다는 ‘죽음 맞이’(즉 임종)라는 단어가 훨씬 적절하다고 보인다.

 

자율적 존재로서 사람은 마지막 순간을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의지에 맞게 선택함으로써, ‘의미 추구적 존재’로서 자아를 완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숨을 멈출 시간과 장소 및 방법의 선택, 마지막까지 함께 해줄 사람과 의식(儀式)의 선택, 의미추구의 완결작업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와 평가, 인간관계와 관련된 화해·조정 및 용서와 축복, 그리고 남는 자에 대한 유촉과 당부 등은 ‘갑자기’ 죽음이 들이닥치기 전에,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사전(事前)에’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 품위있는 죽음을 위한 ‘능동적 죽음맞이’

근대의 의료제도는 질병에 대한 치료(cure)에 전념하느라 환자에 대한 보살핌(care)에는 상대적으로 등한시해온 경향이 있다. 또한 관료화된 병원규칙과 의료행정의 효율성으로 인해 환자의 인격적 존엄성과 자율적 선택권은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한 예로, 의료진 자신도 현 제도 아래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더 이상 삶의 질을 보장할 수 없는 말기환자에 대해 ‘무의미한 연명치료’(unnecessary prolongation of life)를 지속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회생 불가능한 상태에서의 연명치료는 환자 본인에게도 ‘품위없는 죽음’(death with indignity)이라는 불명예를 안겨주지만, 가족과 주위사람들에게도 막중한 고통과 부담을 안겨준다.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에 관한 문제는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철학적 물음과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앞으로 지속적인 사회적 토론과 법제화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공론장에서의 토론을 거쳐 존엄사(euthanasia)가 제도화되기까지는 요원한 시일이 예상된다.

 

따라서 제도적 차원에서의 법제화와는 별개로, 개인적 차원에서 ‘품위있는 죽음’을 원하는 사람 본인에 의한 사전대비와 플랜화가 시급하다고 보인다. 근래에 일어나고 있는 ‘사전 의료 의향서’ 작성 운동은 ‘품위있는 죽음’과 ‘준비된 죽음’을 위한 사전대비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사전 의료의향서’는 환자자신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처할 경우에 대비하여, 자신이 받을 치료의 범위와 한계를 미리 설정하여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문서이다. 미국의 경우 1994년에 존엄사 법을 만들어 ‘사전 의료 의향서’를 표준화했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아직 개인적인 의사표명에 불과할 뿐 법적인 효력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람은 사물과 달리 의식을 가진 존재다. 사람은 의식을 가짐으로 인해 자기선택과 자기결정이 가능하게 된다. 그나마 아직 의식이 또렷하여 자기통제력과 의사결정능력이 제대로 작동할 때, 미리 앞서 죽음에 대비하는 능동적 자세야말로 품위있게 죽음을 맞이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우리말에서 ‘맞이’라는 말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태에 능동적·주체적으로 대처하는 일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대보름맞이’란 정월 대보름날 밤하늘에 떠오르는 달을 내가 능동적·주체적으로 나서서 환영하고 반기는 놀이를 말한다. 달은 내가 원컨 원하지 않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떠오른다. 달 뜨는 일이 비록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개되는 불가항력적 사건이기는 하지만, 내가 능동적으로 나서서 반기고 맞이하는 행위를 통해, 역으로 내가 주체가 되고 달이 객체가 되는 것이다.

 

‘달맞이’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해맞이’나 ‘돌맞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가오는 자연적 흐름에 주체적·능동적으로 대처함으로써, 나는 ‘수동적 객체’에서 ‘능동적 주체’로 그 위상을 반전시킬 수 있게 된다. ‘죽음맞이’ 또한 마찬가지이다. 불가항력적으로 다가오는 운명의 순간에 주체적·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예비함으로써, 수동적 객체로서의 ‘죽어감’은 능동적 주체의 ‘죽음맞이’로 그 의미가 역전되게 되는 것이다.

 

그간 아쉽게도 ‘죽음’에 관한 논의는 우리사회에서 터부시되어 왔다. 죽음에 관한 터부시는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막연하게 공포심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이해와 달리, 정작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에게 공포심은 그렇게 크지 않다는 사실이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디고리와 로스먼에 의하면,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소멸’ 즉 생물학적 죽음 때문이 아니라, 죽음이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는 ‘삶의 목표’를 성취하지 못하도록 기회를 앗아가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연구의 결과로 볼 때, 죽음에 대한 공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그리 크지 않으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생물학적 소멸’에서 기인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의미추구 활동’의 단절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실 현상학의 관점에서 보아도 ‘생물학적 죽음’ 그 자체는 그다지 두려움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다. 현상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죽음’은 ‘깨어나지 않는 잠’에 드는 일이나 마찬가지이다. 살아있는 동안 우리의 의식은 항상 어딘가를 지향한다. 하지만 잠에 들면 우리의 의식은 지향하기를 멈춘다. 다행히 잠에서 깨어나면 우리의 의식은 다시금 분주하게 어딘가를 지향한다. 죽음이 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죽음은 다만 우리의 의식이 지향하기를 ‘영원히’ 멈춘 상태일 따름이다.

 

이처럼 알고 보면 별반 두려울 것도 없는 죽음에 대해 막연한 공포심을 가지고 금기시하는 일은 죽음을 앞둔 환자를 위해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죽음에 관한 정보의 부재는 환자로 하여금 ‘준비된 죽음’을 가로막는 장애가 될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환자를 ‘품위없는 죽음’(death without dignity)으로 내모는 요인이 된다. ‘준비된 죽음’ 그리고 능동적인 ‘죽음맞이’를 위해, 의료진이 환자에게 죽음을 ‘사전 예고’ 해주는 일은 잔인한 일이라기보다 오히려 고마운 처사로 인식을 바꿀 때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사회의 통념상, 죽음에 대한 ‘사전 예고’는 아직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죽음에 관한 정보의 유통은 대략 다음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1)은폐(closed): 주위사람들이 환자의 죽음에 관한 정보를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환자 에게는 이러한 정보를 전달하지 않고 은폐하는 경우

(2)의심(suspected): 주위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환자가 의심을 하면서 그 진위여부를 확인하려고 하는 경우

(3)가장(pretense): 주위사람들이 환자의 죽음에 관한 정보를 숨기고서 모르는 척 가장하거나, 반대로 환자가 자신에게 닥쳐올 죽음에 대해 인지하고서도 주위사람들에게 모르는 척 가장하는 경우

(4)공개(open): 환자와 주위사람이 죽음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면서, 공개적으로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 경우

 

(1)~(3)의 경우, 곧 닥쳐올 죽음에 관한 정보의 부재는 환자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자기관리’의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정보의 부재상태에서 환자는 주위사람과 죽음과 관련된 의미있는 대화를 전개할 수 없으며, 이는 환자로부터 ‘준비된 죽음’의 기회를 빼앗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 하지만 (4)의 경우, 죽음관련 정보의 공개로 말미암아 환자와 주위사람들 간에 의미있는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게 되며, 생전의 일에 대한 화해와 용서 그리고 사후의 일에 대한 당부와 유촉이 가능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남는 자’ 사이에서 갈등을 초래할 수 있는 재산처리, 상속, 장례절차 등의 사안에 대해 터놓고 논의할 수 있게 됨으로써 ‘준비된 죽음’이 한결 쉽게 가능해진다.

 

의료진에 의해 전달되는 ‘죽음 사전예고’는 환자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비탄, 절망, 상실감 등에 빠지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죽음 사전예고’는 환자 자신이 이러한 부정적 감정을 극복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제공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거나 주위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하는 소중한 계기로 작용한다. 훌륭한 의료진이라면, 죽음이 예고된 환자에 대해 통증완화를 위한 치료(cure)의 차원을 넘어, 인간적 배려(care)와 감정의 치유(healing)까지 담당할 수 있어야 한다.

 

‘감정치유’ 프로그램이 담당해야 할 주된 임무는 환자로 하여금 특히 ‘자아 존중감’(self-esteem)을 잃지 않도록 돕는 일이다. 물론 자아존중감의 유지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일은 인격적 주체로서 환자의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일이다. 인간은 비록 태어날 때는 자율성이 없었지만, 최소한 죽음과 관련해서는 자율성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질병-중심의 의료체계에서 환자-중심의 의료체계로, 그리고 치료-중심의 병원제도에서 치유-중심의 병원제도로의 이행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 싸나토로지 협회’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도 바로 여기에 있다.

 

■‘품위있는 죽음’과 인륜성의 성숙

싸나토로지(thanatology)는 의미추구적 존재인 사람이 품위있게 ‘자기 완결’을 이룰 수 있도록 안내하고 보조하는 통섭학문이다. 질병치료 및 통증완화와 관련된 자연과학, 인간됨의 의미와 자기완성을 다루는 인문과학, 그리고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다루는 사회과학, 이 세 분야가 통섭적으로 협동하여 ‘개별생명’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 인륜성의 성숙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 이 학문의 최종적 지향점이다. 이러한 거시적 목표에 입각하여, 부산대학교와 부경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이루어지는 ‘죽음교육전문가과정’과 ‘상실비탄애도전문가’ 과정의 구체적인 목표와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1) ‘죽음의 의미’와 ‘품위있는 죽음’에 관한 철학상담 프로그램 구축

(2) ‘준비된 죽음’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구축

(3) ‘통증완화’를 넘어선 ‘감정치유’ 프로그램 구축

(4) 떠나는 자와 남는 자 간의 화해 및 상처치유를 위한 ‘인간관계 회복’ 프로그램 구축

(5) ‘사전 의료 의향서’의 표준화 및 제도화 추진

(6)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에 관한 공론화와 법제화 추진

(7) 평화롭고 품위있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기타 의료제도적 모색

 

한국에서 임종학(thanatology)은 이제 갓 시작하는 학문이다. 고령인구가 갈수록 증가하는 현 추세에서 ‘죽음 잘 맞이하기’(well-dying)는 ‘잘 삶’(well-being) 못지않게 이 시대의 중요한 화두로 대두되고 있다. 죽음에 다가서는 일이 생명활동의 한 부분이듯이, ‘죽음 잘 맞이하기’는 결국 ‘잘 삶’의 일부이다.

 

품위있게 생을 마감하는 일은 죽는 사람 자신이 자아존중감을 확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며, 남은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임종학의 성숙과 발전을 통하여,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의미없는 ‘사물로서의 죽음’ 대신 의미추구적 존재로서 ‘품위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임종학의 성숙은 곧 인륜성의 성숙을 의미하며, 인륜성의 성숙은 떠나는 사람이나 남는 사람 모두에게 안정과 평화를 선사하게 될 것이다.

 

 

‘삶과 죽음의 질’ 향상을 위한 죽음교육 필요성에 대한 제고

 

 최근 모 일간지에서 ‘죽음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한국에서의 ‘죽음의 질’ 문제를 연재로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연재된 기사를 보면 ‘죽음의 질’의 문제를 지적만 했을 뿐, 정작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누가 무엇을, 무엇을 가지고 누구에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은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의 ‘죽음의 질’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제시해 주는 것도 언론의 기본 의무일 것이다.

 

‘죽음의 질’과 항상 연동되어 따라 나오는 문제가 바로 사전의료의향서와 연명치료중단이다. ‘죽음의 질’의 문제 즉 ‘존엄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전의료의향서’와 ‘연명치료중단’이 시행되어야만 하는 것이 곧 ‘죽음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등식으로 보는 듯하다. 그렇다면 과연 ‘죽음의 질’ 향상은 사전의료의향서와 연명치료중단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최근 대통령소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산하 특별위원회에서 소수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형식적으로 치러진 소위 국민공청회를 거쳐서 마련한 ‘연명치료중단’ 입법화 문제는 이제 국회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연명치료중단’이 함유하고 있는 원래의 의미와 방향이 그 본질과 전혀 다르게 생뚱맞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유독 필자만 느끼는 것일까? 생명은 절대자가 개인에게 부여한 것이며 그 누구도 침해하거나 해악을 끼칠 없는 절대적으로 존중되어야할 대상이다. 따라서 제 3자가 그 생명을 대상으로 어떠한 행위와 결정을 한다고 할 때(의료적 행위를 포함)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해서 환자의 자율적 선택과 의사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이 사전의료의향서에 기초한 ‘연명치료중단’의 의미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전의료의향서’ 작성운동과 무의미한 ‘연명치료중단’결정은 과연 이러한 본질적 의미의 맥락적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한국에서의 ‘연명치료중단’ 결정은 환자의 자아존중감에 의한 자율적 선택과는 자못 거리가 먼듯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사전의료의향서 작성이 환자의 가치관과 신념에 의한 순수한 자기결정권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가족의 재정적 부담)에 의해 강요되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의 많은 부모들의 삶이 대부분 자기중심적 삶이라기보다는 자식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분들이라는 전통 문화적 훈습을 감안한다면, ‘자아존중감에 의한 자기결정권’이라는 사전의료의향서 작성의 홍보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지레 짐작할 수 있다.

 

둘째 무의미한 ‘연명치료중단’ 결정이 국민연금기금의 고갈과 현 정부의 보편적 복지실현의 공약과 이어져 있다는 점이다. 즉 환자의 순수한 고통과 무의미한 치료를 고려하기 보다는, 복지기금의 효율적인 쓰임과 소모를 줄이겠다는 물질적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능적 공리주의 입장에 기초해있다는 점이다. 과연 환자의 남은 생명을, 심지어 그것이 무의미한 치료라고 하더라도 효율성과 기능적 이익의 극대화로 환원될 수 있는 사안인가?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한 ‘죽음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서의 ‘사전의료의향서 작성’과 무의미한 ‘연명치료중단’ 결정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필자는 다음의 사항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언제가 국가보건산업정책의 일환으로 반드시 실천해야할 사항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죽음교육’이다. 삶은 상실의 연속이다. 죽음도 그 상실 과정의 한 부분이다. 죽음에 따른 슬픔과 분노· 절망 · 우울의 감정이 환자와 가족 사이에 화해가 되지 않는 다면 진정 품위 있는 존엄사에 이르게 할 수 없다. 평온하고 품위 있는 죽음,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주체적인 죽음맞이는 죽음교육을 통해서 가능하다.

 

둘째, 인간의 품위 있는 존엄사의 문제를 무의미한 ‘연명치료중단’의 범주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죽어가는 환자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귀담아 들어 그것을 실행하도록 하는 것이 진정 존엄사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사전의료의향서’의 근본정신은 연명치료중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일상적 삶의 소중한 부분을 발견하고 누리는 것’에 있다. 지금까지 의학은 환자를 질병치료의 대상으로만 여겨온 탓에, 환자의 남아 있는 생명과 삶의 질 · 인간관계의 회복과 화해 · 감정치유와 자아완성 등의 문제에 대해서 등한시해온 경향이 있다. 이것을 확보해달라는 것이 사전의료의향서 작성의 근본 취지이다.

 

임종환자에 대한 무리한 심폐소생술과 인공호흡기부착, 항암약물요법은 이런 소중한 것을 놓쳐버리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사전의료의향서가 나오게 된 것이다. 한국사회에서의 사전의료의향서 작성이 곧바로 연명치료중단으로의 귀결 현상은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국민연금기금의 고갈과 보편적 복지를 위한 정부정책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지, 순수하게 환자 중심의 자기결정권에 의한 존엄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존엄사의 문제를 연명치료중단에만 국한 할 것이 아니라 환자의 가장 큰 공포와 불안, 고통이 혼자라는 생각 · 버림받았다는 생각 · 사랑받지 못하는 마음 · 수치심과 · 죄책감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이를 해결해주는 것이 연명치료중단보다 더 본질적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환자의 존엄사를 위해 ‘자율적 선택과 자아존중감’이라는 현란한 미사여구로 연명치료중단을 주장하고 있지만, 또 다시 ‘죽음의 질’의 문제를 물질적 타락으로 내몰고 있다. 인간은 질료적 한계를 뛰어넘는 영적인 존재이다. 이제 연명치료중단이 복지예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조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가 인간다움을 회복해 나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2015년 3월부터 부산대학교와 부경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진행되는 “죽음교육전문가 · 상실비탄애도전문가” 과정의 죽음교육은 ‘죽음의 질’을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인륜성을 진화시키는 문화성숙의 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본다.

 

[발제문]

“환자의 가장 큰 공포와 불안, 고통은 - 혼자라는 생각 · 버림받았다는 생각 · 사랑받지 못하는 마음 · 수치심과 · 죄책감이다. 이를 해결해주는 것이 연명치료중단 보다 본질적으로 더 중요하다”

 

“연명치료중단 결정의 입법화는 국민연금기금의 고갈과 정부의 보편적 복지실현의 공약과 이어져 있다. 즉 환자의 순수한 고통과 무의미한 치료를 고려하기 보다는 복지기금의 효율적인 쓰임과 소모를 줄이겠다는 물질적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능적 공리주의 입장에 기초해있다”

 

“우리는 또 다시 ‘죽음의 질’을 물질적 타락으로 내몰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질료적 한계를 뛰어넘는 영적인 존재이다. 보다 성숙한 사회를 위해서 의료보험복지예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연명치료중단을 권고할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사회의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죽음교육은 죽음의 질을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인륜성을 진화시키는 문화성숙의 한 계기가 된다.”

 

김근하 (왼쪽에서 네번째, 상주출신,  재부상주향우회 회장)

 -고신의과대학에서 해부학을 전공(해부학박사)하고, 중국요녕중의대학원에서 중의학을 전공(중의학 박사)하였으며, 한양대학교 글로벌 의료경영MBA 전공(경영학 석사)과 미국 UNM(University of Natural Medicine)에서 자연의학을 전공(자연의학박사)하였다. 그리고 미국 죽음교육 및 상담협회(Association for Death Education and Counselling, ADEC)의 공인 죽음학 전문가(Thanatologist)이며 한국 국제싸나톨로지스트 1호이다. 현재 전일의료재단·한가족요양병원 명예이사장 겸 좌천의원 원장, 고신의과대학 해부학외래교수, 부산대학교·부경대학교 평생교육원 ‘죽음교육전문가’과정 주임교수, (사)자연치유관광포럼 부이사장이다. 저서로는 『임종영성프로그램』, 『자연치유와 건강식품』, 『품위있는 마무리』가 있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상주시민신문
 
 
1/35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주간베스트 TOP10